"그럼 이놈의 클론을 만드는 일은 모두 잘못된 겁니다. 그래선 안 돼요...그래요? 난 모르겠는데요. 만일 그들이 열 명의 평균적이고 비능률적인 ET엔지니어들이었다면, 그들이 모두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을까요? 이러면 어쩔 겁니까? 지진이 일어나서 굴이 무너지기 시작할 때, 그들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뛰었다면 어쩔 겁니까? 광산 속으로 더 싶이요. 예를 들어 가장 깊이 있는 사람을 구하러요? ...하지만 난 여전히, 보통의 당황한 열 사람의 경우라면, 아마 더 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빠져 나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어슐러 K. 르귄, '아홉 생명'中, "마니아를 위한 세계SF걸작선 단편"
...
내가 '다원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건 아마도 다원주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29년 동안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역동적'이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한국에서 모더니티 담론 따위는 조선시대 때나 했던 이야기일 뿐이고 포스트 모더니티라는 담론 역시 유행이 지나 버린, 포스트-_-포스트 모던 사회를 살고 있는듯 하다. 하지만 2009년의 한국이라는 곳은 모더니티가 확립된 적이 없는, 아마도 모더니티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사회이다.
'한국적 모더니티'라는 단어를 자꾸 들이대고 '조국 근대화'는 무엇이었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모더니티'라는 단어는 철저하게 서구 유럽의 역사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낸 개념이다. 우리가 그 경험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은 절대로, 전혀 아니지만, '모더니티', '포스트 모더니티'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는 그 개념을 구성하는 기반 요소들에 대한 고려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의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한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던지. 모더니티-근대의 핵심 개념은 '기술 발전의 정도'가 아니라 '합리적 이성을 기반으로 한 개인의 발생'이다. 박정희 시대의 '조국 근대화' 시기는 '개인'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가장 모던하지 않은 시기 아니었던가?
모더니티의 중요한 개념들은 '합리적 이성', '논리학 법칙들', '이분법', '단선적-진보적 시간관', '개인' 등이다. 이 개념들을 확장하면 '발전', '진보', '승리', '합의', '효율', '미래', '투자', '금욕', '계산' 등의 단어들을 유추해낼 수 있다. 매우 낯익은 단어들이다. 한국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부여받고 있는 단어들.
나는 발전과 진보, 미래와 효율 등을 나쁘다고 생각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 컴퓨터 좋아하고 교통수단은 빠른 쪽을 더 좋아하고 비행기 타고 멀리 가봤으면 좋겠고 미래에는 로또-_-도 됐으면 좋겠다. 이른바 '포스트 모던'적인 '다원주의'를 이야기하는 나의 문제제기는, 그러한 단어들, 개념들이 선/악의 이분법을 통하여 '옳다'는 가치를 부여받게 되는 것은 많은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이다. 논리적 문제로 다루어져야 할 것들까니 윤리적 문제가 되기 쉬운 환경에서 '필요'는 '당위'의 문제로 바뀌게 되고, 그 과정에서 '도덕적 정당성'을 가졌다고 소리 지르는 쪽이 다른 모두에게 '당위적인 슬로건'을 주장하고 명령할 수 있게 된다.
무척이나 추상적이고 쓰잘대기 없는 것 같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조금 구체적으로 가지고 오면 무척 현실적인 이야기가 된다.
"이걸 왜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 "~~해야 하니까"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럼 ~~는 왜 해야하는데?"라고 물어보면 "@@해야 하니까"라고 대답하고. 물론 대부분의 질문은 정확한 대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게다가 '인과율'이라는 것은 다분히 허상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러한 질문이 '가능하다'라는 환경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질문의 가능성이야말로 '다원주의'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하기에. 불행히도 많은 경우, '도덕적 권위'에 질문하고, '선'에 질문하고, '미래'에 질문하고, '가치'에 질문하는 것은 '악'으로 낙인찍힐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아닌가? 정말 아닌가?
내가 보기에 '다원주의'라는 것은 두가지 차원-층위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이원주의(이 때의 이원주의는 일원주의와 같다)'-'다원주의'의 구도로 놓을 수 있는 차원의 다원주의. 경우와 시대에 따라서 이 양자는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마치 번갈아 가는 것 같은 모습으로 사회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다원주의는 더 높은 층위의 것으로, 앞에서 이야기한 이원주의와 다원주의를 두 항으로 하는, 모든 것을 다 포괄한다는 차원에서의 다원주의이다. 아마도 내가 이야기하는, 또는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다원주의는 앞서 말한, 이원주의에 대한 대립항으로서의 다원주의인 것 같다. 후자의 경우는, 마치 전지전능한 신을 신성모독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훼손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테니. 인간이 모두 죽지 않는 이상.
우얏든,
나는 다원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사람이다. 다양한 영역에 대한 나의 입장이 존재하지만, 그것과 일치하는 사람이던 반대되는 사람이던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입장은 사절이다. 마치 자신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다른 이를 '계몽'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사절이다.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건 그 사람이 경직되어 있다는 의미이고 굳어졌다는 의미이다. 자신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은 '악'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사람이고, '계몽'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은 '계몽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창건적 이분법'의 태도를 가진 경우도 있지만, 아마도 그런 사람들은 질문을 허용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런 입장을 비판한다. 도그마를 비판한다.
가능한 더 오래, 가능한 더 오래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항상 이방인의 낯선 시선을 가지고 모든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질문이 끊이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헤르메스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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